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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임목사 칼럼

[‘에포케’라는 말을 아십니까?] 02-11-2024


‘에포케’라는 말을 아십니까?

급변하는 현대 사회에서는 빠른 판단력이 미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머뭇거리다가는 뒤처지고 맙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서둘러 판단하고 결론을 내립니다. 그런데 그게 우리 고통의 원인인 거 아세요?

고대 헬라어에 ‘에포케(εποχη)’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원래는 ‘멈춤, 그대로 둠’이라는 뜻인데, 고대 그리스의 회의론자(懷疑論者)들이 ‘판단 중지(判斷中止)’라는 뜻으로 사용했습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행복’을 철학적 탐구의 중심에 놓았습니다. 그들은 흔들림 없는 마음의 상태를 뜻하는 ‘아타락시아’를 행복의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때 마음의 동요로 고통받습니까? 아마 자신의 지식이나 믿음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날 때 마음의 동요가 일어나고 그로 인해 고통을 받을 겁니다. 내가 신실하고 흠 없는 사람으로 믿었던 사람이 그렇지 않은 행동을 할 때, 내가 기대를 품었던 사람이 그에 반하는 생동을 할 때 우리는 흔들리게 됩니다. 회의주의자 철학자였던 퓌론은 이런 판단을 그만둘 때 영혼의 행복을 찾을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판단을 유보하기, 판단을 내릴 때 좀 더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태도를 위하기, 바로 이것이 ‘에포케’ 곧 ‘판단 중지’입니다.

철학자 퓌론에게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그가 배를 타고 가다가 큰 풍랑을 만났습니다. 배에 탄 사람들이 야단법석을 떨고 있는데, 한쪽 구석에서 아무 일 없다는 듯 태평하게 앉아 있는 퓌론에게 어떻게 이 상황에서 태평스러울 수 있냐고 물었더니, 그는 손가락으로 한쪽 구석에서 뭔가를 열심히 먹고 있는 돼지 한 마리를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저것이 바로 지혜로운 사람이 가져야 할 마음이 상태, 즉 아타락시아다.”

그냥 돼지처럼 밥이나 먹고 살자는 게 아닙니다.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난폭한 운명이 지배하는 상황에서, 불안과 걱정으로 세월을 허비하기보다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정말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변화무쌍한 환경에서 우리는 매번 빠른 판단을 강요당합니다. 물론 부지런히 공부하고 변화를 좇으며 살아가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한 걸음 물러나서 더 큰 그림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변화하는 상황에서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않고, 기다리는 미덕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독일의 철학자 후설(Edmund Husserl)은 이 ‘에포케’를 ‘괄호 치기’라고 해석했습니다. 판단을 완전히 배제하는 게 아니라, 우리의 판단과 지식에 일단 괄호를 치고 지켜보자는 것입니다.

목회를 하면서 얻은 지혜가 있다면 섣불리 판단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또는 그의 어떤 행동을 곧바로 판단하지 말고 지켜보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그 이면을 보게 되고, 그렇게 하면 이해할 수 없어 보이던 것들이 이해되거나 수긍이 됐습니다.

바둑에 ‘궁하면 손을 빼라’는 말이 있습니다. 조급해하거나, 서둘러 무슨 수를 쓰려고 하지 말라는 조언입니다.

혹시 누군가에게 실망하셨습니까? 어떤 일 때문에 마음이 상하셨습니까? 잠시 판단을 중지하고 가만히 지켜보면 어떨까요? 요동하던 마음이 고요해지고, 마음의 평화가 찾아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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